가을 말미에서 보내온 편지

어름사니는 끝내 이승을 하직했다. 시월도 마지막 날, 바싹 마른 채 죽어 있는 어름사니를 보았다. 머리카락이 빠진 것처럼 엉성한 집에서, 주인도 없는 사체가 간단없이 떨린다. 높새가 거미줄 치는 초겨울, 복색도 현란한 무당거미의 죽음이 아찔하다. 제집에서 죽었는데도 첫서리에 시드는 나뭇잎처럼 꺾였다. 어찌된 … Read More

통증을 스캔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사고다. 몸이 기우뚱하더니 바위에 어깨를 부딪고 비탈로 굴러내렸다. 발아래는 낭떠러지였다. 하산길을 조심하라는 통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긴장이 풀려버린 탓이다. 하루하루 무사히 지낼 수 있음이야말로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일상의 소중함은 일상을 벗어났을 때 안다.  이튿날부터 팔, 다리, … Read More

밥 먹었어?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1 매해 여름, 풀벌레가 찌르르 우는 무더운 날이면 그 시구가 먼저 떠오른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선생님의 얼굴도. 시를 낭독하는 선생님의 목소리는 얼음이 가득 담긴 허브차를 저을 때 나는 달그락 소리와 닮아 있었다. 허브 특유의 달콤 쌉쌀한 … Read More

케이크는 어찌되어도 좋아

“햇살이 따스하게 내려앉는 봄날이면 볕 아래 웅크린 엄마의 뒷모습이 떠오르곤 합니다. 타닥타닥 큼지막한 믹싱볼에 계란 거품을 내는 소리가 나른한 집안에 울려 퍼져요. 그 빛바랜 믹싱몰은 매일 저녁 아버지가 좋아하는 부추전 반죽을 만드는 그릇이기도 하죠. 그 옛날 값비싼 오븐이 집에 있을 … Read More

바로크 진주

울퉁불퉁 제멋대로 생긴 진주가 있다. 불규칙한 모양으로 변형된 진주를 우리는 못난이 진주라고 부른다. 우리가 선호하는 온전한 구형의 은색 광택을 발하는 진주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변형된 모양을 갖고 있다. 17세기 유럽의 음악, 미술, 건축 등을 지칭하는 바로크가 이 진주의 이름이고 포루투갈어로 일그러진 진주를 뜻한다.   바로크 진주 … Read More

눈물이 진주라면

  엄마의 방에는 장롱이 있었다. 그 장롱 속엔 옥색치마 같은 열두 폭 바다가 있었다. 비파열매 탐스런 옛집, 포구로 뚫린 창에 노을이 찾아들면, 나는 엄마 없는 엄마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석양빛에 반사된 장롱의 매끈한 옻칠은 윤슬을 되튕기는 저녁바다 같았다. 조막손으로 더듬어보는 자개의 오색빛깔 조개껍데기들은 수면 위에 떠오른 무지개 … Read More

초록 단풍

   아침에 눈을 뜨면 꼭 해야 할 일이 없는 하루가 기다리고 있다. 늦은 아침을 먹고 거실 소파에 앉아 무심히 창밖을 바라본다. 출근하는 사람들,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려가는 엄마들이 분주하게 거리를 오가는 모습이 보인다. 활기차게 하루를 시작하는 풍경을 바라보노라니, 생생하게 흐르는 삶의 물결이 나만 제쳐두고 흘러가는 것 … Read More

으름

  살짝 웃는 듯 드디어 입이 벌어졌다. 여린 갈색빛 껍질이 뽀얗고 투명한 속을 드러낸다. 몽글몽글 말랑한 젤리 같은 덩어리가 보인다. 미끈하고 길게 생긴 감자 같기도 하고 홀쭉하게 야윈 키위 같기도 한 으름이 속을 보이고서야 제 이름을 찾는다.   지난 추석 성묫길에 높은 나뭇가지에 덩굴을 올리고 … Read More

창(窓) 

  엄마가 돌아가신 후 물건 정리를 했다. 부엌 곳곳에 소주병이 숨겨져 있었다. 싱크대 아랫단에서 양주병과 포도주가 진열된 찬장 구석진 곳에서, 간장병과 식용유 사이에서도 초록색 병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기제사가 끝나고 시누이와 시고모님의 거침없는 입담이 지나간 후에 돌아서서 몰래 찾아들었을 눈물 한 방울 소주 한 모금. 서울에 … Read More

코뚜레 없는 소가 되어

  나는 오늘도 침대에 누워 새로운 아침을 맞는다. 일본의 100세 여류시인 시바타 도요는 ‘난 괴로운 일도 있었지만/ 살아 있어서 좋았어!’라고 감사의 노래를 하였다. 나도 침대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 햇볕이 시나브로 찾아드는 거실에 홀로 앉아 조용한 아침을 맞는다.   안방에는 고 2 작은아들이 잠들어 있다. 아들은 휴대폰을 끌어안고서 침대에 누워 …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