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뚜레 없는 소가 되어

  나는 오늘도 침대에 누워 새로운 아침을 맞는다. 일본의 100세 여류시인 시바타 도요는 ‘난 괴로운 일도 있었지만/ 살아 있어서 좋았어!’라고 감사의 노래를 하였다. 나도 침대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 햇볕이 시나브로 찾아드는 거실에 홀로 앉아 조용한 아침을 맞는다.

  안방에는 고 2 작은아들이 잠들어 있다. 아들은 휴대폰을 끌어안고서 침대에 누워 온 세상 밖을 헤매고 다녔을 것이다. 세상일에 어찌나 관심이 많은지 새벽까지 인터넷 세상을 돌아다니며 궁금한 점을 모두 풀고서야 잠들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으로 산다는 것은 힘들다. 수능을 앞둔 아이는 배워야 할 것도 할 일도 많다. 아이는 잠을 일찍 잔다는 것은 젊음을 포기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윗방에는 큰아들 대학생이 잠들어 있다. 내가 보기에는 딱 먹고 대학생이다. 아들이 대학생이 되고 나서 나에게 주는 가장 큰 위안이라면 아침에 깨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대학생으로 산다는 것도 힘든가 보다. 부모 둥지를 떠나 처음으로 맞닥뜨린 세상이 녹녹하지 않은지 자기 방문을 닫아걸어 놓고는 밤새도록 게임에 미쳐 있었을 것이다.

  골방에는 내 평생지기가 잠들어 있다. 아침 해가 거실 중앙에까지 들도록 꼼짝도 하지 않는 방문 소리에 문을 열고서 살며시 들어가 본다. 내 평생지기는 이불을 한쪽으로 걷어치우고 잠들어 있다. 침대에는 둥근 달덩이가 두 개나 떠 있다. 둥근 두 달이 나를 보고서 방긋이 웃는 것 같다. 나는 이불을 끌어 덮어준다는 핑계로 이불속으로 들어가 살포시 끌어안아 본다. 눈도 뜨지 않고 아기 같이 옹알이를 한다.

  “지금 몇 시야?”

  “조금 더 자도 돼”

하며 힘주어 끌어안아 본다.

  “일어나야 하는데”

하고는 오히려 내 품으로 파고들며 눈도 뜨지 않는다. 내 골 방지기와 한 이불을 덮은 지도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었다. 하지만 최가가 이가는 될 수는 없는가 보다. 이제는 둘이 맞추려 하기 보다는 서로가 차이를 인정해주고 다름을 받아들여 줄 때가 된 것 같다.

  내 눈은 점점 또렷해지고 이미 깨어버린 잠이 다시 올 리가 없다. 아침 선잠에 취해 뒤척이는 골 방지기 품을 빠져나와 또다시 혼자 거실로 나온다. 커피포트 스위치를 누르고 아메리카노 알 커피를 한 숟가락을 타서 휘휘 저어 놓는다. 나는 마지막 남은 잠을 쫓아 버리려 애쓰며 커피 한 모금을 마시자 입안에 쌉싸름한 커피 향이 감돈다. 휴대폰에 저장해 놓은 음악을 틀어 놓으니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조용하던 집안에 음악이 흐르며 아침을 깨운다. 평화로운 아침이다.

  내가 음악을 아무리 크게 튼다고 해도 아이들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젊은 청춘으로 산다는 것은 힘이 든다. 지금의 대한민국처럼 불확실성 시대를 살고 있는 두 아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밤잠을 못 이루고 늦게까지 젊은 청춘을 불태웠을 것이다. 밤잠을 줄여서라도 머릿속을 꽉 채우지 않으면 이 나라에서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집에는 머릿속을 채우기 위해 잠 못 이루는 청춘들이 있다면 사무실에는 빠듯한 일정에 머릿속이 꽉 차서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청춘들이 있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움직이는 젊은 직원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애잔하기도 하다. 사무실에는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집으로 돌아가면 돌봐야 할 젖먹이들이 있으니 말이다. 그들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해 보인다.

  내 나이 오십 줄이 넘어서면서 삶은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맡기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해 본다. 노자는 ‘가르치지 마라! 배우면 근심이 되니 비우라!’하였다. 인간사에 자신의 삶을 맡기고 산다는 것은 고달픈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이 인간사에 삶을 맡기고 사는 것이 잘못이라고만은 할 수 없어 그저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바라볼 뿐이다. 까만 밤을 하얗게 불태우며 아이들의 머릿속이 영글어 갈수록 빠듯한 일정에 젊은 직원들의 머릿속이 터질 듯이 꽉 차갈수록 오히려 내 머릿속은 텅 비어 간다.

  이제는 날 찾는 이도 할 일도 없다. 소가 멍에를 벗어놓고 한가로이 풀을 뜯듯이 코뚜레마저 없는 소가 되어 글로서 소회를 밝히며 이 아침을 맞는다. 그 어느 누군가가 그토록 눈 뜨길 원했을지 모를 이 아침을 나 또한 ‘살아 있음에 행복하여라!’ 하고 감사한 아침을 맞는다.



심사위원

  • 김관수 수필가 (계룡문인협회 수필분과이사)
  • 박주용 시인 (2014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등단, 현 (사)한국문인협회계룡시지부장)

심사평

타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고택의 장독대처럼 단아한 문체 돋보여

  「코뚜레 없는 소가 되어」는 현 시대를 살아가는 자식을 비롯한 청소년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아내를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하고 재치와 위트가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수필의 맛을 느끼게 하였다. 더불어 중년 남성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에 대해 성찰하는 내용이 가슴에 와 닿았다. 신인문학상 당선작으로 선정하는데 심사위원 두 사람 모두 합의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앞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개성적인 글을 써 고택 장독대의 간장처럼 독자와 은은하게 간 맞추기 바란다.

“코뚜레 없는 소가 되어”에 대한 1개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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